1997년 초 동남아시아에서부터 시작된 외환위기는 대만을 거쳐 그해 11월 우리나라에도 시작되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 외채상환을 요구받았고, 만기 연장을 위해 동분서주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면 기업들이 쓰러지고 수많은 가장들이 길거리로 나앉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외환위기 이전까지 연 7%대의 고도성장을 구가하며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린 결과는 너무도 참혹했습니다. 그때 그 시절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1. 쓰러지는 대기업 그리고 중소기업, 소기업, 자영업, 가정들

 

1997년 1월 한보그룹의 부도를 시작으로 기아 그룹, 대우그룹, 삼미그룹, 진로그룹 등 30대 그룹 중에서 17개 그룹이 부도가 났습니다. 대마불사로 알고 있던 대기업이 이 정도면 중견기업이나 중소기업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돈을 버는 사람이 없으니 소비도 자연히 줄어들어 자영업자들도 많이 망했습니다.

 

기업들의 잇따른 부도로 인해 이들의 채권을 가지고 있던 은행도 타격을 받았는데요. 26개의 시중은행 중 16개의 은행이 없어져 그야말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5대 시중은행이었던 조흥은행, 상업은행, 제일은행, 한일은행, 서울은행은 모두 후발주자에게 합병당해 사라졌습니다.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병해서 한빛은행이 생겼고 한빛은행은 다시 우리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제일은행은 스탠다드차타드에 경영권이 넘어가 SC제일은행이라는 상호로 바뀌었고, 서울은행 역시 하나은행에 흡수되었습니다. 하나은행은 이후 외환은행도 합병하여 KEB하나은행으로 바뀌었습니다. 조흥은행도 신한은행에 합병당했고요. 이렇듯 시중 5대 은행이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모두 무너짐에 따라 '은행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라는 고정관념이 무너졌습니다. 금융빅뱅의 결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은행들로 재편되었고, 지금도 은행들의 살아남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경제위기로 경제가 하락하는 모습을 설명

 

2. 늘어나는 실업자들

 

기업들이 연일 부도가 나는 상황에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도성장 시절 우리나라는 종신고용 즉, 입사하면 그 회사에서 퇴직하는 것을 당연시했었습니다. 따라서 중간에 그만두면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인 듯한 눈초리를 받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대량으로 실업자가 양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업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재취업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외환위기에 휩싸인 상황에서 마땅히 이들이 취업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가정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 거리에 나와 노숙을 하는 가장들이 많아지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무기력한 상황이 서민들에게 닥쳐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 위주였지만, 기업의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대리급까지 구조조정을 당하는 암울한 상황에 빠집니다.

 

1997년, 1998년에 사회에 진출한 사회 신입생은 낯선 상황에 마주치게 됩니다. 기업들이 부도나서 없어지고, 살아남은 기업들도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 마당에 신입사원을 뽑을 여력이 충분치 않아, 이들이 입사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전까지 단군이래 최대 호황을 구가하며 잘나가던 취업시장에는 외환위기 이후 본격적인 청년 실업난이 시작됩니다.

 

이때의 영향으로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더 나은 대우와 기회가 있으면 이직을 하는 문화가 정착됩니다. 기업들의 구조조정과 비용 절감의 결과로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타입의 근로 형태가 생겨났고요. 취업난은 더욱 심화되었고 부의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3. 주식시장과 원-달러 환율

 

실물경제의 붕괴는 주식시장에 곧바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시 1,200선에 가깝던 코스피지수는 외환위기 직후 500선을 밑돌았고, 1998년 6월 무렵에는 280선까지 떨어졌습니다. 이때 재빠른 판단으로 주식에 투자해 거금을 만진 이들도 있지만, 개미들은 패닉에 빠져 어쩔줄을 모르던 시기였습니다. 또 주식투자를 한다손 치더라도 투자할 자금이 없었고요. 내일을 살아내기 바쁜 시절에 주식투자는 언감생심이었습니다.

 

고도성장이 계속 될 때, 우리나라의 달러 대비 환율은 800원 선이었습니다. 당시에도 환율이 고평가되었다는 여론은 있었는데요. 이 환율이 1달러당 2,000원 가까이 상승하게 됩니다. IMF의 구제금융만으로는 자금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IMF가 금리 인상을 강요한 결과였습니다. 이 결과 외국 자금들이 금리 차이를 노려 유입되긴 했지만, 높은 금리는 국민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었습니다.

 

일단 외국에 유학을 간 사람들에게 비상이 걸렸습니다. 학비가 갑자기 2배로 뛴 것과 같은 결과니까요. 그래서 당시 기업들의 부도에 금리 인상이 더해져 유학생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국내로 돌아오는 사태가 줄을 이었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고금리의 혜택을 보았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대출을 받았거나 받고자 하는 이들에겐 역시 고통이었습니다.

 

주식시장의 급락으로 주식을 사야하나 팔아야하나를 고민하는 모습

 

4. 떨어지는 집값

 

고도성장 시절에는 집값이란 으레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는 것이 집값이었습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부동산 가격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저렴한 가격으로 급매물을 쓸어 담아 돈을 번 사람들도 있었고요. 이 당시 자산을 부동산으로만 구성한 부자들과 기업들은 환금성이 떨어지는 바람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5. 금 모으기 운동

 

1907년 일제에 빌린 차관 1,300만 원을 갚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지 정확하게 90년 뒤, 금 모으기 운동이 벌어집니다. 목적은 90년 전과 같이 '빚갚기'입니다. 이 운동의 후대 평가와는 상관없이, 당시에는 망한 나라를 되살리는 심정으로 그야말로 '십시일반' 금을 모았습니다. 전세계적으로도 보기 힘든 이 금모으기 운동은 우리나라가 IMF체제를 벗어나는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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