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정찰제의 정착으로 많이 사라졌지만, 제가 어릴 적만 해도 물건을 살 때는 흥정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전통시장에서 뭐라도 살 때면 으레 흥정을 하곤 했는데요. 이렇게 가격 협상을 할 때도 우리가 모르는 협상의 기술들이 숨어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앵커링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세일기간 중에 많이 깎아주는 것처럼 보이려고 할 때 동원되는 기법이기도 합니다. 앵커링 효과란 무엇일까요?

 

 

 

 

1.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란?

 

앵커(Anchor)는 우리말로 '닻'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배를 항구에 정박할 때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고정하는 닻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닻을 물속의 펄에 박아두면, 배는 심한 조류에도 일정 범위 이상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앵커링 효과란 이처럼 어떤 기준이 제시되면, 이 기준에 얽매여 제시된 기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닻내림 효과', '정박 효과'라고도 번역되기도 하는데요. 우리의 머릿속에 특정한 이미지나 숫자 등이 각인되면, 그것을 벗어나서 자유로운 판단을 내리기 힘들어집니다. 머릿속에 고정된 이미지에 현혹되어 나에게 불리할지도 모르는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이죠.

 

배를 정박할 때 사용하는 커다란 닻

 

앵커링 효과를 증명한 유명한 실험은 대니얼 카너먼의 숫자판 실험과 에베레스트산 높이 실험이 있습니다. 1에서 100까지 적힌 숫자판을 돌리게 한 후 UN에 가입한 아프리카 국가의 비율을 물었더니 무작위로 나온 숫자판의 숫자를 근거로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숫자 20이 나온 사람은 40%보다 낮은 수치를, 70이 나온 사람은 80%를 말했던 것입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의미 없는 숫자가 기준점이 되어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대답한 것이죠.

 

에베레스트산 높이를 모르는 피실험자들에게 한 그룹에게는 에베레스트산의 높이가 600m보다 높은지 낮은지 정확하게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고, 다른 그룹에게는 1,400m보다 높은지 낮은지 정확한 높이를 물었습니다. 그 결과 앞의 그룹이 대답한 평균적인 산의 높이는 2,400m였고, 뒤의 그룹은 평균 1,300m였습니다. 대니얼 카너먼이 제시한 산의 높이가 기준점이 되어 피실험자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바다에서 닻을 내린 채 정박해 있는 배

 

2. 앵커링 효과가 적용된 사례

 

앵커링 효과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할인판매가 바로 그것입니다. 1만 원이라는 가격에 X 표시를 하고선 5천 원이라고 적혀 있으면 굉장히 저렴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판매자가 기준점을 의도적으로 1만 원으로 설정해 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소비자는 이 제품이 정말로 1만 원의 가치를 가진 제품인지 합리적으로 따져보지 않고 반값이라는 할인율만 눈에 들어옵니다.

 

판매전략에도 앵커링 효과가 숨어 있습니다. 마트의 대형가전매장 코너에 가면 제일 앞에 아주 크고 비싼 대형 TV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500만 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은 제품을 본 뒤 100만 원대의 TV를 보면 아주 싸다고 느껴집니다. 가전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 머릿속에 500만 원이라는 가격표가 기준점으로 자리 잡힌 탓입니다.

 

앵커링 효과를 이용할 때 사용하는 대형 TV

 

식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근사한 식당에 가족끼리 외식하러 갔다고 가정합시다. 모처럼의 외식인데 맛있게 먹고 싶습니다. 메뉴판을 펼치니 1인분에 10만 원 하는 메뉴가 보입니다. 그 다음 장을 펼치니 2만 원, 1만 원, 8천 원 등등의 메뉴가 있습니다. 10만 원에 비하면 2만 원은 아주 저렴하고 합리적인 가격처럼 보입니다. 식당 주인은 사실 2만 원과 1만 원짜리 메뉴를 팔고 싶었던 것입니다.

 

집을 옮겨갈 때 자연히 집값을 비교합니다. 지금 10년 된 20평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이 아파트의 가격은 2억 원입니다. 근처 역세권에 새로 들어서는 20평대 아파트 가격은 5억이라고 합니다. 새 아파트가 좋아 보이긴 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비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것은 앵커링 효과에 빠진 것입니다. 새 아파트의 비교 대상은 비슷한 환경의 새 아파트여야 합니다.

 

비싼 가격부터 적혀 있는 메뉴판

 

그러나 앵커링 효과가 가장 요긴하게 쓰이는 경우는 가격협상을 할 때입니다. 딱히 정가가 붙어 있지 않은 물건을 어느 한 상인이 100만 원에 팔고 있다고 한다면, 100만 원이 앵커가 됩니다. 이것이 협상의 기초가격이 되고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협상할 때 통설과는 다르게 가격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 때로는 유리할 때도 있습니다.

 

몇 년 전 미국과 사드 협상을 할 때 트럼프 대통령이 사드 배치 비용으로 1조 2천억 원을 달라고 요구한 사실이 있습니다. 부동산 매매를 할 때 판매자가 턱없이 높은 가격을 부르기도 하고요. 1억 원짜리 매물을 3천만 원에 산다고 한 뒤, 안 판다는 판매자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3천만 원을 기준으로 가격을 올려 결국은 1억 원에 훨씬 못 미치는 가격으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두를 앵커링 효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협상할 때 기준점을 먼저 제시함으로써 가격협상을 유리하게 가져가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3. 앵커링 효과를 피해 가는 법

 

앵커링 효과는 대상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다면 더욱 위력을 발휘합니다. 이 말은 이미 가치나 가격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면, 기준점에 덜 휘둘린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비합리적인 기준점을 부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최대한 많이 수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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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숫자가 혹시 기준점 역할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만약 하고 있다면 이 기준점은 합리적인지 꼼꼼히 따져봐야 하고요. 이러한 판단 결과, 가치에 비해 비싸다고 생각되면 과감히 포기하거나 아니면 본인이 또 다른 기준점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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